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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남순] 어느 날에

/ 2015. 11. 19. 23:57








졸업식에는 눈이 왔다. 하늘에 뭐라고 뚫린 마냥 펑펑 내린 눈은 운동장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채 쌓이지도 못한 채로 녹아가는 것을 멀겋게 보다가 교복 마이를 입은 몸을 좀 더 움츠렸다. 누나가 준 꽃다발을 한 손에 든 채 부모님이던 친구던 다같이 모여서 사진을 찍어대는 인파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찾았다. 깡깡 대면서 나 오늘은 그냥 잘 거다, 했지만 서도 그 성격 어디 가겠는가. 결국엔 외로워서라도 학교에 나왔을 것이다. 아싸건 말건 그 외로운 집보다야 사람 온기라도 있는 곳이 좋을 테지.
 
 
누나가 바빠서 오래 못 있어, 미안해 흥수야. 괜찮겠어? ...딱 한번인데. 눈썹을 팔자로 늘이며 말하는 얼굴이 선뜻 머리를 스쳤다. 분명 고남순은 어딘가에서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유난히도 고남순은 나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보고 알았다. 바람이 차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파에 접어들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시큰거리는 다리에 스스로 걸음을 늦췄다. 느릿하게 학교의 이곳 저곳을 돌며 고남순의 머리 꼭지를 찾아 다녔다. 항상 시선이 닿는 곳에 있던 녀석이어서 그런가, 보이지 않으니 딱 그맘때 3년이 떠올랐다. 퇴원하자마자 찾아갔지만 고남순이 없던 집이. 아무리 찾아도, 소식을 알음알음 들어봐도 들리지도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던 3년.
 
 
오정호 패거리에게 맞고 있던 골목, 나 담배 피우려다 고남순한테 걸린 뒤뜰, 남순이 깔려 죽을 뻔 했던 체육 창고, 둘이서 청소한 계단참,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둘러보던 게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흘끗 본 2반에는 남순이 없었다. 그리고 2반 뒷문으로 시작해서 주르르 이어지는 꽃잎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걸었다. 타박타박 복도에 웅성이듯 울리는 운동화 밑창이 마찰되는 소리가 쟁쟁 거리며 들린다. 드문드문 떨어졌음에도 나는 용케도 꽃잎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기름칠이 안 됀 소리가 끼르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이 추위에 평상에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있는 고남순이 보였다. 곱슬곱슬한 뒤통수가 허연 연기를 뿜었다.
 
 
 
"고남순."
".........?"
 
 
 
고개를 돌린 고남순의 발간 입술엔 장초가 물려있었다. 그 아래로 꽁초 두어 개가 떨어져 있었다. 쓰읍, 하고 연기를 들이 마신 고남순이 정신이라도 차린 건지 파드득 어깨를 떨며 담배를 떨구곤 운동화 발로 비벼 껐다. 픽, 탄식하듯 웃은 나는 끊었다면서. 하고 나긋하게 물었다. 으음, 그냥, ...오늘따라 말리더라. 샐쭉 웃는 녀석의 옆에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분명 제 손으로 사온 것일 테다. 그 집 양반이야 뭐, 오는 날을 세는 게 더 빠를 양반이었으니까. 초등학교 때도 그랬다. 지네 집에 어른이라곤 아버지 하난데 그 마저도 안 들어온 거 뻔히 아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 하며 같은 반 아이들의 대답을 회피했었다. 그때 뭐라고 물어봤었지? 그래, 그 꽃다발 어디서 났냐고 물었었지. 몽그랗게 퍼지는 입김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맑아졌다 한다. 옆에 앉으려다 손 끝이 다 빨갛길래 그냥 데리고 내려왔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가라고 할 거 아니까 그냥 손 잡고 학교를 벗어났다. 바스락대는 꽃다발을 감싼 비닐소리가 두 개였다.
 
 
 
"흥수야 어디 가냐."
"집 간다, 새꺄."
 
 
 
한참 서로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얌전히 옆에서 걷던 고남순이 하아, 하고 숨을 뱉으며 시선을 도르르 굴렸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오므리다 이내 바닥으로 눈을 굴렸다.
 
 
 
"왜."
"...고백 받았더라."
"......."
 
 
 
누나랑 만나기 전에 교실에서 받았다. 한 학년 후배인 여자애한테. 물론 거절했지만.
 
 
 
"....받았냐."
"안 받았다."
 
 
 
별 관심 없는 척 무심하게 답하자 고남순 손가락이 움찔하고 떨렸다. 해가 짧아져 주변이 사뭇 달라졌다. 그 때 울었던 골목이었다. 걸음을 멈추자 따라오던 남순이 내 등판에 코를 부딪혔다. 아이구, 작게 앓는 소릴 내는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추위에 언 뺨이 발그레 했다. 말갛게 마주보는 남순을 보고 있자니 참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중학교 이후로 닫아두고 감추고 또 애써 부인 했던 감정이 녹진녹진하게 올라와 가슴을 감싸는 기분이다.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살짝 시선을 비킨다. 항상 그랬다. 눈을 마주하면 고남순은 곧잘 마주해오는 시선을 피했다. 죽어라 달라붙고 애교를 떨며 이잉이잉 거릴 땐 언제고, 그렇게 시선을 피한다.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되냐, 남순아."
 
 
 
성을 뗀 채 부르는 게 오랜만이라 입술 밖으로 나오는 것이 어색했다. 도륵도륵 눈알을 굴리더니 입술을 끌어올려 새액, 웃더라. 초승달 마냥 휘어진 눈을 빤히 보다 천천히 몸을 끌어안았다. 찬 바람에 얼었던 두 몸이 붙으며 온기라도 찾으려는 듯 빈틈 없이, 한 몸이라도 될 듯 남김없이 꽉 붙었다. 마치 그게 원래 한 몸이고 원래 그랬던 구체의 그것 마냥. 쿵, 쿵, 쿵 맞닿은 가슴팍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제게 들렸다. 나랑 똑같은 소리다. 나랑 똑같은 속도다. 고남순의 가슴에도 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좋아하는 거 같아. 아니, 좋아한다 고남순."
 
 
 
내 심장이 오랫동안 고남순을 알게 모르게 품었던 것처럼 고남순의 심장도 무의식에, 아주 깊은 의식 속에서 내가 끊임없이 주고 또 보듬은 사랑에 저도 모르게 박흥수를 품은 모양이다. 등뒤로 둘러지는 팔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웃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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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gg노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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