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수남순] 가슴시린 이야기
남순은 품에 항상 숨겨두었던 백금색의 반지를 손에 굴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손바닥에 굴려지는 얇은 이물감에 눈이 감겨온다. 어렴풋, 옅게 남은 향기에 미어지는 가슴을 한 번 눌러보았다. 자조적인 숨을 후, 뱉으며 암흑이라도 집어먹은 듯 까맣게 빛을 내는 강물에 그것을 던져버렸다. 백금색의 그것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마저도 함께 가라앉는다.
가슴시린 이야기
"너는 왜 남자 사는 자취방에 자꾸 찾아 오냐."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새침하게 웃음 짓던 은지의 얼굴을 남순은 그저 멀겋게 바라봤다. 뒤에서 어기적어기적 나온 박흥수가 아, 왔어? 하며 뒷머리를 슬슬 긁는다. 까만 무광 단화가 단정히도 현관에 벗어지고 하얀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오는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움츠러들었다 펴지는 손이 무안해보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등 허리께에서 살랑거렸다. 남순은 굳었던 표정을 지우며 아이 진짜 저게, 하는 평소와 같은 타박을 날려보였다. 박흥수가 허허 웃으며 손을 들어주는 소리가 들린다.
"상식적으로 멀쩡한 여자애가 왜 자꾸 찾아와. 것도 남자 둘이나 있는 데에."
"우리가 남이냐. 자그마치 10년 지기 소꿉친구다 인마."
"남자는 죄다 늑대라는 것도 모르냐? 하긴...너한테 접근한 남자라는 게 있어야 알겠지."
이게 또!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등짝에 내리쳐진 작은 손바닥에 눈물이 찔끔 난다. 꺄르륵 웃으며 박흥수와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웃는 얼굴이 참으로 해사하기도 하다. 남순은 잠깐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나저나- 하며 말꼬리를 늘인 은지는 하얗고 긴 손을 뻗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그러쥐었다. 잘그락 걸린 백금 색 반지가 하얀 손위에 놓였다.
"도대체 고남순의 그녀는 누구인거야??"
"...아직도 그게 궁금하냐. 그만 좀 물어봐."
영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니 박흥수가 그거 나한테도 안 알려준다. 쟤랑 나랑은 13년 친군데. 하고 섭섭한 소릴 한다. 손에 놓인 걸 도로 옷 안으로 숨겨본다. 눈동자가 이지러질 정도로 웃음을 지으며 평생 비밀이다, 이것들아. 하고 말해본다. 여전히 서운하다는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치사해.", "나빴네. 그치?" 하며 종알거린다.
"....나쁘니까."
그렇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본다.
*
확확 변하는 주변 풍경에 차창에 기대었던 고개를 조금 더 틀었다. 부러 멀미라는 변명을 부과해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서늘하게 창문에서 느껴지는 바깥 공기와 잔잔하게 흐르는 자동차 라디오의 발라드 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감싸왔다. 남순은 몇 시냐. 하고 조용히 물었다. 조금 더 있어야 도착이라는 박흥수의 말과 멀미 많이 심해졌느냐는 은지의 말에 남순은 그저 눈을 감으며 머리를 도리도리, 작게 흔들었다. 그냥 졸려서. 얼버무린 말과 함께 차안은 발라드에 묻혀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아마도 내가 귀를 닫았을지도 모른다. 둘만의 대화가 싫어서. 닫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땐 푹신한 온기가 온몸을 노곤하게 안고 있었다. 깜깜한 방안에 저를 위해 켜둔 스탠드가 노란 조명을 빛내고 있었다. 원래는 아마 박흥수네 도착하자마자 놀고먹고 마시려고 했었는데 내가 잠드는 바람에 아마 계획도 틀어졌겠지. 그렇다고 딱히 나한테 화를 내지는 않겠지만. 이불을 거두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여전히 엉덩이는 침대에 붙인 채였다. 온 몸에서 박흥수 냄새가 그득하다 못해 풀풀 풍기는 것 같았다. 보드라운 러그의 감촉이 발바닥에 여실하게 느껴진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재끼고 방에 딸린 욕실 문을 열었다. 딸칵, 하고 켠 욕실 불은 하얗다. 조용하게 닫힌 욕실문과 함께 스며들듯 흰 불빛이 감추어진다.
다리핏에 맞게 샀던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미키가 그려진 후드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병신스럽게도 해말갛게 웃는 미키 마우스를 한번 쿡 찔러주고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소파 등받이 위로 올라온 머리통 두 개. 일부러 발소리를 내어 다가가자 동시에 고개를 돌려 올려보더라. 남순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냉장고 문을 열어 캔 맥주 세 개를 꺼냈다.
"잠 다 깼나보다, 고남순?"
"응. 덕분에 잘 잤네."
키득거리는 웃음에 맞춰 같이 키득여 본다. 다리가 짧은 테이블 위에 캔 두개를 놓아주니 저들끼리 집어 든다.
"넌 그거만 마시고 땡이야. 니 술버릇 정말 못 봐줘."
".....알아 새꺄. 나도 그러려고 했다."
애초에 나는 박흥수 앞에서는 취하고 싶지 않다. 유은지 앞에서는 더더욱. 과일 잘라다 줄게. 좋다고 말갛게 웃는 얼굴에 웃음으로 화답한다. 부엌에 멀거니 서 과도로 사가지고 온 과일 껍데기를 깎아낸다. 개수대 안으로 툭, 툭 소릴 내며 떨어지는 껍데기와 꼭지들을 보며 남순은 손을 움직였다. 그러다 멍청하게 제 손을 썰어버릴 뻔했다. 피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며 은색 개수대에 빨간 핏방울들을 떨어트렸다. 엄지손가락을 물에 대충 씻어내고 접시를 테이블 가운데에 얹었다.
"어휴, 엉덩이 무거운 것들. 여자가 있는데도 내가 과일을 깎아 오냐."
"아, 뭐 어때! 잘하는 애가 하면 되지!"
"근데 넌 어디 가냐?"
"잠깐 좀."
박흥수 집이야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는 항상 화장실 선반에 구급상자를 구비해둔다. 남순은 화장실 문을 잠그며 구급상자에 든 밴드 하나랑 연고를 꺼냈다. 피가 살짝 멎어 덜 나는 거 깨끗하게 닦아내고 연고를 짜 바른 손가락에 밴드를 착, 붙였다. 포르르, 얕은 한숨을 내뱉은 채로 문고리를 잡은 남순은 애써 웃으며 화장실을 나갔다. 남순아 손! 하는 은지와 박흥수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귀를 닫았다.
*
괜스레 답답해서 잠 못 자다 선잠 들었다가 어느 순간에 깊게 잠들었나보다. 이미 끊었던 담배였는데도 피우고 싶어져 집안이 아닌 밖으로 나갔다. 박흥수는 담배 안 피우니까. 집안 어딘가에서 담배 냄새 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어 개피를 피운 남순은 연기를 치워내듯 몸을 툭툭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가면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가야 했는데 남순은 잠시 그 사이의 공간에 멍청하게 서있었다. 등이 켜졌다가, 꺼졌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거실의 무드 등이 등색을 밝혔다.
몸을 기댄 벽의 서늘함이 머리까지 올라가 아까부터 빙글빙글 돌던 뇌를 식혀내듯 냉기를 올려 보냈다. 웅얼웅얼 거려서 잘 들리지 않던 소리들 사이에 "좋아해." 박흥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꽂혀 들어왔다. 다시 현관을 나섰다. 움직임 때문에 켜진 등은 금세 꺼졌다. 후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슬리퍼를 직직 끈 남순은 그대로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 하나를 샀다. 알루미늄 겉면에 맺힌 물방울이 미끄러지듯 흐른다. 하늘의 달이 흐려졌다. 하아, 짧은 한숨이 뱉어졌다.
잊으면 된다.
내 기억 속에서만 잊으면 되는 일이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남순은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오죽 답답해야 이럴까, 스스로를 위로하며 남순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슴푸레한 새벽빛 때문에 약간 푸릇한 집안은 선선했다. 간밤에 보일러는 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이 또 제 마음만큼 찬 것인 듯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들오들 떨릴 정도가 아닌데도 이상하게 추워서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렸다.
어정쩡한 기분으로 헤어지고 며칠 안 돼서 금방 다시 모이게 되더라. 터덜터덜 힘아리 없이 걷던 남순은 등을 짜악, 하고 치는 매서운 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작은 키와 여린 체구의 그녀였다. 아, 유은지! 하고 소릴 빽 지르니 깔깔 웃는다. 진짜 기집애가 웃는 거 하고는. 중얼거리니 내가 뭐어. 하고 팔짱을 슥, 낀다. 몸이 움찔 떨렸다. 발소리가 섞여 시끄럽다. 팔랑 팔랑 움직이는 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거슬린다. 지긋하게 눈을 감아본 남순은 그녀의 말에 의미 없는 웃음을 흘리며 실속 없는 대답을 건넸다.
같이 오는 걸 본 박흥수는 허허, 웃으며 어쩌다 같이 온 거냐며 사람 좋게 묻는다. 오다가 만났다며 발랄하게도 대답하는 목소리가 안으로 사라져갔다. 소파에 몸을 길게 늘여 앉은 남순이 "오늘은 웬 일로 불렀냐." 하고 묻자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며 박흥수가 대답했다. 가슴 속부터 싸늘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에 떨리는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다.
"난 네가 할 말 있다고 하면 불안하더라. 또 무슨 일인데."
니가 말할래? 싫어, 니가 말해라. 응? 속닥거리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잘 들려서 일부러 재촉했다. 샐쭉 웃은 은지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보여주며 수줍은 듯 말했다. "우리 결혼 할 거야." 합, 숨을 삼킨 남순은 멍해진 정신을 되잡으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여야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의 묻어둔 기억이 치고 올라왔다. 조근, 조근 작게 말하던 탓에 잘 들리지 않던 말들과, 그 속에서 지독하게 선명히 들린 좋아한다는 박흥수의 목소리. 애를 쓰며 지우고 또 지웠던 것들이 무색하게 선명히 떠오른다.
"...허....정말로...?"
고개를 끄덕이며 흥수의 팔을 끌어안은 유은지는 제 머리에 기대는 박흥수를 느끼며 맑은 웃음을 내보였다. 일부러 무시하고 잊으려고, 못 본 척 하려고 했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부정조차 할 수 없게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맞잡은 손에서 은색 반지가 참으로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나더라.
"너네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연애도 안 하고....무슨."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일찍 하려구. 그치?"
"응. 일찍 하려고. 그리고 이거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준거야. 아직 엄마랑 누나한테도 안 말했거든."
"나도, 나도. 내 친구들한테 아직 얘기도 안 했거든? 고마워해라 고남순? 축의금도 빵빵하게 넣고."
너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어. 그 말이 비참해서, 고개를 숙이다가, 웃으며 말한다.
축하한다, 결혼.
5월의 신부인 너에게, 5월의 신랑이 된 너에게.
그렇게 말해본다.
*
손에 쥐었던 청첩장을 펼쳤다, 다시 접는 것을 반복한 남순은 도통 차에서 나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행복을 빌어주길 바란다는 정갈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내가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결혼식 따위 파토나면 좋겠다. 무의식에 뱉은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남순은 그대로 서럽게 눈물만 흘렸다. 조잡하고 더러운 속마음에, 저리도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에게 불행을 바란다니.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그러면 안 되잖아. 스스로를 힐난해가며 자학했다. 더러운 새끼.
똑똑, 하고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선팅이 된 유리너머로 박흥수가 보였다. 허둥지둥 눈물을 쓱 닦아내고 나가자 제비꼬리 마냥 뒤가 두 갈래로 갈린 게 마치 꽃을 떠나 날아가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팔랑 움직였다. 단정한 머리카락과 언뜻 보이는 뒷덜미에 부러 닦았던 눈물이 다시 나올 것 같았다.
"뭐야, 울었냐."
"별로. 잠 못 잔거다."
"...서운해 하진 마라. 먼저 결혼 한다고 나 너 혼자 두진 않는다."
"................"
"담배 피울래."
신랑이 담배는 무슨. 하객이나 받아라. 그리고 이거, 축의금. 등을 밀어내며 그의 손에 흰 봉투를 건넸다. 우물쭈물하다가 등을 돌린 박흥수의 뒷모습이 점점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너의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나는 너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걸까.
드레스 단이 짧고 하늘하늘 한것이 그녀의 하얗고 매끈한 다리를 곧게 보여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늘하늘한 면사포가 머리카락과 함께 춤을 추듯 움직였다. 특유의 웃음소릴 내며 고남순! 하고 말갛게 부르는 유은지에게 남순은 킥킥 웃어보였다. 쿵쾅쿵쾅 힐을 신었으면서도 발을 구르며 제법 개구진 얼굴로 내려왔다.
"임마, 다리도 못난게 왜 그렇게 짧은 걸 입고 그러냐."
"뭐, 고남순 죽을래?!"
"어휴, 신부 말하는 것 좀 봐라. 신부가 아니라 신랑인 줄 알았다."
퍽퍽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옆구리에 꽂혔다. 억, 아파, 아파. 장난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속은 복잡했다. 작은 키 너머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속에서 반갑게 맞이하고, 반기고, 인사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유독 큰 키 덕분에 빌어먹게도 한 눈에 들어왔다. 남순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따 봐!"
그가 부르는 손짓에 유은지는 그새 박흥수의 옆에 서서 오는 그의 엄마와 누나에게 인사했다. 누나와 눈이 마주쳐졌다. 흥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 제게 다가왔다. 식장 뒤뜰에 둘이서 선 채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흥수, 결혼하는 거 보니까 어때. 섭섭하니?"
"....아뇨, 제가 한 게 있는데. 섭섭하면 안 되죠."
푸스스, 옅은 웃음을 짓는다. 간간하게 누나도 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직감적으로 그것이 말의 요점이 아니라는 것을 남순은 알아차렸다.
"그건 이제 괜찮아. 누나도 그만 할게."
"............."
"그러니까 너도 그만해."
쏴아아, 하고 바람에 나무가 흔들렸다.
*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고 또 고결한 듯 빛났다. 실내보다 야외가 더 좋다는 은지 덕에 푸릇하고 싱그러운 5월의 화사함 사이에서 그들은 결혼한다. 프로포즈 할 때 꼈던 걸 그대로 쓰는 걸 보니 둘이서 그렇게 얘기 했나보다. 행복하게 웃는 두 얼굴과 손가락에 다시 끼워지는 것에 남순은 손을 들어 제 가슴께를 매만졌다. 신체 일부분마냥 여태껏 걸고 다녔던 것이 만져졌다. 곧이어 둘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는 것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환호와 기쁨이 넘치는 곳에 애탐과 슬픔이 홀로 서 있다.
한참 만에 사진 찍는다고 여럿 몰렸다가 셋이서 찍자는 말에 유은지와 박흥수가 손을 흔들었다. 고개만 도리도리 저으며 어색하게 웃으니 둘이서 작정하고 다가와 끌고 간다. 남순은 픽, 웃는 시늉을 하며 유은지를 사이에 둔 채로 선 남순은 웃으라는 사진사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참담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배웅해야 맞는 거겠지만 지금 배웅하면 도저히 좋은 기분으로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남순은 식장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다음에는 아직 식을 올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은 남순은 손에 든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뒤에서 정갈한 발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에 툭, 얹어지는 손버릇은 박흥수였다. 남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왔냐." 하고 중얼거렸다.
"배웅도 안 해주냐. 형님 섭섭하다."
"섭섭할 것도 많다. 가서 무리나 하지 마라. 많이 걷지 말고."
"....다리 얘긴 그만해라. 기껏 좋은 날인데."
"....그러게."
한숨과도 같은 웃음이 흐른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결혼해도 우리 계속 친...."
"흥수야."
"어?"
"미안해."
뭐? 하는 말과 동시에 두 뺨을 잡아채 그대로 입술을 부딪혔다. 부드러운 그 입맞춤에 애달픔과 슬픔, 사랑, 원망, 속에 내재되어 저를 괴롭히던 모든 잠재적 감정들을 쏟았다. 주르륵,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흥수야, 흥수야, 흥수야, 쉼 없이 속으로 불러본다. 남순은 제 행동을 후회함과 동시에 후회하지 않았다. 더 이상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 테지만 박흥수의 기억에는 지독하리만치 깊게, 또 생경하게 남을 것이었다. 13년 지기 친구는 게이였으며 저를 좋아했다. 라고. 스스로에게 둘도 없을 독이 되겠지만, 더는 만날 수도 없는, 그 고독함과 외로움, 사무치는 그리움이 평생 졸졸 쫓아올 것이었지만, 주체할 수는 없었다.
넘쳐흐르는 이 감정을.
"미안하다."
남순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꽉 막힌 목소리와 함께 박흥수의 얼굴은 경악으로 들어찼다. 입술을 가린 손을 한 번 쓰다듬었다. 눈물로 얼룩진 제 얼굴을 숙이며 남순은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가는 박흥수의 뒷모습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봤다가는 정말, 무너질 것 같아서.
'시간을 가지자. 당분간은 연락 하지 않을게. 이기적이라 미안해. 내가, 전부 잘못했다.'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끝으로 남순은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바로 핸드폰 가게로 가서 핸드폰을 정지 시켰다. 부재중과 문자가 잔뜩 있었다. 홀드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검어졌다. 그리고 살고 있던 집을 내놨다. 스스로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지우고 아무도 모르게 짐을 챙겨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곳은 연인들의 마지막 흔적인 반지 따위를 내던진다는 한강이었다. 아름다운 야경을 얼을 빼놓고 보고 있었다.
남순은 품에 항상 숨겨두었던 백금색의 반지를 손에 굴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손바닥에 굴려지는 얇은 이물감에 눈이 감겨온다. 어렴풋, 아스라이 남은 향기에 미어지는 가슴을 한 번 눌러보았다. 자조적인 숨을 후, 뱉으며 암흑이라도 집어먹은 듯 까맣게 빛을 내는 강물에 그것을 던져버렸다. 백금색의 그것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마저도 함께 가라앉는다.
문득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너 흥수 좋아하는 거 하나도 모를 줄 알았니?'
싸늘히도 말하던 말이.
'흥수 다리 그렇게 된 것도 네 탓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흥수를 좋아해?'
울분을 눌러 담은 목소리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어떻게, 어떻게 그래...!'
'내가 다 용서할게. 그러니까, ...'
이제 그만하라던 중의적인 의미의 말.
차에 시동을 걸다말고 남순은 숨을 흡, 들이쉬었다. 찰나의 순간에 파노라마 같이 뇌리를 스쳐가며 떠오른 박흥수와의 그 수많고 무수한 추억들도, 기억도, 사건 사고들이 둑이 터져 물이 쏟아져 나오듯 터져 나왔다. 남순은 이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절규하듯 바람을 타고 퍼지는 울음소리가 애처로운 짐승의 소리 같았다. 끅끅, 하고 멈추지 않는 흐느낌을 감추려는 듯 클락션 소리가 크고 길게 울렸다.
-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남순은 몸을 일으켰다. 얇은 두깨의 이불이 흘러내렸다. 인적 드문, 사람의 발길도 뜸한 바닷가 마을에 자리를 잡은 남순은 새로 지어진 펜션에서 일했다. 물론 손님은 별로 없지만 서도, 그나마의 사람과의 살 부빔이 있는 곳이었다. 아침의 나른함에 몸을 늘어뜨리다 고개를 돌려 나이트스탠드에 세워진 액자의 유리면을 살살 쓸었다. 가운데가 찢어진 사진은 양 사이드가 사이좋게 붙어있었다. 마지막 욕심을 부리듯 보란 듯이, 그렇게 붙어있었다.
"........"
여전히 핸드폰은 죽은 상태였다.
'고남순.'
'전화해.'
단 두 마디만 남은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는다.
마음은 여전히 사랑에 아파하고 있었다.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한 때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볼 자신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언제쯤이면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때, 그 일을 후회하면서도, 남순은 후회하지 않는다.
*
헉, 아이구 힘들어. 어제부터 끄적이던게 좀 길어졌네...;;; 저번에 얘기했는데 K윌 그 뮤비가 흥순이랑 닮았다고 했잖아요. 그 망상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뮤비랑 좀 다른 부분이 있긴 해요. 정말 그대로 쓰기에는 스스로가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더니 망글똥글이 나왔네...;;;
+흥수는 그 뒤로 남순이를 찾았을 거예요.
+그러다가 잊으려고 노력할거예요.
+하지만 다시 그날이 떠올라 괴로워서 잊을 수 없을테고.
+남순이가 바라는 대로 되긴 했을 거예요. 결혼생활이 많이 정말 행복하진 않았을 거예요.
+남순이의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흥수도 행복하진 않겠지만 남순이도 외로울거예요.
+원래도 아무도 없던 남순이 곁에 흥수 뿐인데 스스로 또 옆을 떠나고 사람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에 살죠.
+소통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에 아파하며, 여전히 그리워 할 거고요.
+입장의 차이겠죠. 흥수의 입장으로 보면 흥수의 인생을 또 한번 꼬아놓은 남순이가 나쁜 새끼고.
+남순이의 입장에선 오랫토록 짝사랑 하던 흥수가 결혼하니 당연히 박흥수가 나빠보이겠죠.
여기에 반지 얘기가 나왔었져.
반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뉘엿뉘엿 바다 뒤로 넘어가는 해가 발갛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멈췄다. 엊그제부터 열이 펄펄 끓어서 며칠 드러누웠더니 기어이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모로 누워 나이트스탠드의 제일 첫번째 서랍을 열었다. 깊숙한 곳에 숨겨진 반지 하나를 손에 그러쥐었다. 하나는 물에 빠졌지만 도저히 이것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래전 일이었을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흥수네 엄마 생신이라 둘이서 시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흥수네 엄마 드릴 생일 선물을 고르고 있었던 때였나.
"우리 엄마 생일이니까 같이 고르자."
학교가 끝나자 마자 덜그럭 덜그럭 소릴 내는 빈 가방을 든 채로 시내가 뛰어갔었다. 기웃거리며 찾아다니다, 마트에 들어갔었다. 조그마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비누를 집었다가 박흥수가 "그런 거 말고, 좋은거 골라줘." 하며 울상을 짓길래 내려놓고 궁시렁댔다. 저 비누면 우리 집에선 되게 좋은건데. 할인마트를 나서며 시내에 무수한 가게들을 보며 뒷머리를 머쓱하게 긁적이다 문득 금은방의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반지들에 시선을 빼앗겼더랬다. 반지라고 해 봤자 엄마가 끼우고 있었던 게 전부였던 나에게 화려한 모양새를 갖추고 빛을 받는 반지들이 그렇게 예쁘게 보일 수 없더라. 내 멈춘 걸음을 알아차린 흥수가 그걸 보더니 제법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저 반지가 제일 좋아. 나중에 결혼할 사람 생기면 저 반지 주면서 결혼하자구 할거야."
어렸었는데도 그 말이 어쩜 그렇게나 깊게 다가오던지, 나도 모르게 그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방이 온통 어른과 머리 두엇 큰 학생들이 전부인 금은방 쇼윈도 앞에서. 어렸었는데도 축구공 한 팔에 끼우고는 꼭 저 반지를 주겠노라 하는 박흥수가 그리도 멋있고 듬직해보여 나도 한 켠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반드시 저 반지를 나눠 끼우겠다며 정말 어린아이 다운 발상을 했었다.
그 반지의 대상이 절대로 박흥수가 될 거라고는, 내 어릴 적의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는 끝내 버렸지만 아직도 미련마냥 가지고 있는, h.s 라고 이니셜이 안쪽에 그려진 것은 여전히 서랍장 깊은 곳 한 구석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있었다. 손에 끼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마치 박흥수 같은 반지는 아마도 영원히 저 서랍장 구석에 있어야 할지도. 서랍장 문을 조심스레 닫은 나는 서랍 문에 새겨진 무늬를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슬슬 이사를 가고 싶어졌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른다면, 어쩌면, 너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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